왕가위 감독의 95년 작품 [동사서독]은 보지 못했다. 

한 때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즐겨보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의 영화는 마치 광고를 보는 듯 세련된 영화미를 즐길 수 있어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아비정전(1991)], [중경삼림(1994)], [해피투게더(1997)], [화양연화(2000)].


95년에 나온 [동사서독]은 마치 시같은 작품이었다고 한다.

이번에 보게 된 [동사서독 리덕스]는 왕가위 감독이 다시 편집하면서 장국영 분량을 늘리고 스토리를 좀더 이해하기 쉽도록 시간 순서로 배치했다고 한다.

영화는 절기 순서로 대략 1년간의 이야기를 펼친다. 

입춘, 하지, 백로, 입춘이라는 단락 구분이 영화스토리의 시간전개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동사서독'이라는 영화제목만 보면, 동사와 서독이라는 두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 같지만,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서독이라는 별명을 가진 구양봉이 주인공으로 느껴진다. 

구양봉에서 시작해서 구양봉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구양봉의 시선을 통해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해듣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구양봉은 뛰어난 검객이 되기 위해 고향을 등지면서 사랑하는 여인을 버린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와서 사막에 정착해서 청부살인업자로 살아가면서도 고향과 여인을 잊지 못한다. 

구양봉의 친구, 황약사(동사)는 매년 경칩되면 구양봉을 찾아오는데, 

어느 해 황약사가 기억을 지워준다는 술을 가지고 구양봉을 만나러 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일 년이 지나 다시 경칩이 되어 구양봉이 황약사를 기다리지만 그는 오지 않고, 

자신의 연인이 2년 전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고, 마침내 구양봉은 자신의 처소를 불태우고 떠나간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구양봉, 그의 친구 황약사, 황약사의 친구인 맹무살수, 맨발의 무사인 황칠,

그리고 구양봉의 연인인 자애인, 맹무살수를 짝사랑하는 모룡연,  맹무살수의 아내인 도화삼랑, 동생의 복수를 하고자 하는 완사녀다.

이 인물들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영화를 채운다. 


1. 모룡연의 황약사에 대한 짝사랑.

모룡연은 뛰어난 여성검객인데, 남장을 하고 다니다가 우연히 황약사를 만나 호감을 갖게 되어 여동생을 소개해주기로 한다. 

하지만 황약사가 여동생을 더는 만나주지 않자 남장한 채로 구양봉을 찾아봐 여동생을 배신한 황약사를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모룡연의 여동생이 구양봉을 찾아와서는 자신에게 집착하는 오빠를 죽여달라는 부탁을 한다. 

구양봉은 모룡연이 오빠와 여동생으로 인격분열을 일어키고 있음을 알아본다.

 

2. 황약사의 도화삼랑과의 불륜.

맹무살수의 친구인 황약사는 친구의 아내인 도화삼랑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떠난다.

이로 인해 맹무살수는 황약사를 죽이기로 결심하지만 실제 그를 만났을 때는 그를 죽이지 못한다.


3. 맹무살수의 죽음

복사꽃을 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지만 돈이 없어 고향에 가지 못한다.

어릴 때부터 눈이 나빴던 그는 서른이 된 해에 거의 눈이 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눈이 거의 먼 상태에서 사막의 마적대와 대결하다 죽음을 맞는다.


4. 길 떠나는 황칠

맨발의 무사인 황칠이 눈이 없어 배를 곯는 것을 보고 구양봉은 황칠에게 청부살인업자의 삶을 제안한다. 

황칠은 청부살인업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견딜 수 없어한다. 

결국 구양봉을 찾아와 달걀과 당나귀를 줄테니 동생의 복수를 해달라고 애원하던 완사녀, 

구양봉으로부터 거절당한 완사녀의 복수를 황칠은 달걀 하나를 받고 해준다. 

완사녀의 복수를 해주던 과정에서 손가락을 잃고 크게 부상당한다. 

완쾌된 후 그는 사막까지 자신을 찾아온 아내와 함께 더 깊은 사막으로 떠난다. 


5. 황약사를 그리워하는 도화삼랑

맹무살수가 죽고 난 후 구양봉이 봄에 복사꽃을 보러 맹무살수의 고향을 찾는데,

그 곳에서 황약사를 애타게 기다리는, 맹무살수의 아내 도화삼랑을 만나게 된다. 

맹무살수가 그토록 다시 보고 싶어하던 복사꽃은 진짜 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아내를 뜻하는 것임을 구양봉이 알게 된다.


6. 구양봉을 그리워하다 죽는 자애인

구양봉과 사랑했지만 자신을 버리고 떠나기로 한 구양봉 대신 그의 형을 남편으로 맞는 자애인.

자애인은 결혼 후에도 계속 구양봉을 그리워한다. 

황약사는 일 년에 한 번 자애인과 구양봉을 만난다. 

자애인의 아들이 10살인 그 해, 황약사는 자애인에게 기억을 잊는 술을 얻어서 구양봉을 찾아온다. 

자애인이 죽고 황약사는 그 술을 가지고 구양봉을 만나러 와서는 혼자 그 술을 마시고 취한다.


이 영화 속에는 이루지 못한 여러 사랑들이 등장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왕가위 감독의 화두였다고 한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답게 영상미가 탁월하다. 

사막의 풍경, 그 속의 인물들, 인물의 클로즈업, 속도감 넘치는 검투, 계절의 변화 등

서로 죽이는 검투의 장면을 재빠른 움직임만 잡아서 잔인하지 않고 아름답게 영상을 만들었다는 점이 다른 무협영화와의 차이점이다. 

영화의 장면도 영화의 대사도 시처럼 느껴진다. 

감독이 그리고 싶었던 것은 삶의 허무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었나 보다.

그래서 영화의 영어제목 'Ashes of time(시간의 재)'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동사서독 리덕스]는 시각적으로 만족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사색하도록 만드는 멋진 영화였다. 

[동사서독]이 더 시적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는 모양인데, 언제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보고 싶다.


아,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을 연기하는 

장국영(구양봉), 양조위(황약사), 양가휘(맹무살수), 장학(홍칠), 장만옥(자애인), 임청하(모룡연), 도화삼랑(유가령), 완사녀(양채니)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이 영화를 보는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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