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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단편집 [불한당의 세계사], 악한 인물들에 대한 기존 글의 재해석

즐거운책벌레/소설

by 산삐아노 2020. 8. 28.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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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도서관이 문을 닫아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없는 시절이니까 집에 있는 책을 차례로 읽을 수밖에 없다. 

오래 전 친구가 주었던 소설책, 보르헤스의 [불한당의 세계사(민음사, 1994)].

 

1. 이 책은 실제로 존재했던 악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르헤스가 다시 쓴 것들이다. 이미 글로 쓰여졌던 것을 다시 재구성해서 쓰는 것은 동시대적 언어로 재규정한다는 것이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대로 새로운 이야기는 없고 이야기의 변형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보르헤스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잔혹한 구세주 라자루스 모렐, 황당무계한 사기꾼 톰 카스트로, 여해적 과부 칭, 부정한 상인 몽크 이스트맨, 냉혹한 살인자 빌 해리건, 무례한 예절 선생 고수께 노 수께, 위장한 염색업자 하킴 데 메르브,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 기타 등등.

각 이야기들은 아주 짧은 단편이다. '기타 등등'에 실린 이야기는 더 짧다.

 

나는 예전부터 단편애호가였다. 장황한 이야기보다는 압축적이고 간명하게 표현된 짧은 글이 좋았다. 그런 점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나랑 통하는 점이 있는 작가다. 그는 한 권의 책을 한 문장으로 쓸 수 없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압축미에 집착한 작가라는 것이다. 나는 보르헤스가 압축적인 글을 추구한 것에 대해서 공감한다. 압축적인 글은 긴 글보다 아름답다. 

 

2.첫번째 인물 라자루스 모렐은 악당 중에 악당이랄 수 있는 인물인데, 흑인차별주의자, 즉 인종차별주의자였다. 

불쌍한 흑인들을 이용해서 돈벌이를 삼았다. 그의 욕망을 들여다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양키가 아니었다. 그는 남부의 백인이었고 백인의 아들이며 백인의 손자였다. 그리고 그는 사업에서 은퇴하면 상당한 규모의 목화 농장과 머리를 수그리는 일단의 노예들을 소유한 신사로서의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잔혹한 구세주 라자루스 모렐' 중에서)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로서 성공한 삶을 꿈꾸었던 모렐. 인간의 악한 욕망은 그냥 생기는 것은 아니고 분명 그 사회가 영향을 끼치는 것이 분명하다. 모렐은 19세기 말 사람이지만 그가 살던 시절의 노예제의 흔적은 아직도 미시시피강 주변, 루이지애나 주와 같은 미국 남부에 그대로 남아서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흑인들은 언제든 백인경찰의 총에 목숨을 잃거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미국은 아직도 노예제의 역사를 지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모렐과 같은 악당은 여전히 미국 땅에서 생겨날 수 있으리라.

 

두 번째 인물 톰 카스토르는 사기꾼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유없이 늘 쾌활한 성격, 그치지 않는 미소, 그리고 한없이 온순한 태도는 그가 성을 카스트로라는 어떤 가족으로 하여금 호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황당무계한 사기꾼 톰 카스트로' 중에서)

톰 카스트로는 남을 속일 수 있는 외모, 태도, 성격을 타고 났고 그의 타고난 능력은 보글이라는 교활한 흑인을 만나 희대의 사기꾼으로 거듭태어났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사기가 세상사람들을 속게 만들고, 마침내 그의 사기행각이 드러났을 때도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길 그만두질 않는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를 사랑하면서 그의 변호와 고백을 들어주었다는 이야기는 사실 소름이 끼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기꾼들에게 속아주고 있는 것인 현실인가를 생각할 때 이런 톰 카스트로같은 인물은 지금도 우리를 속이고 있다. 특히 종교인, 정치인, 연예인 등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이들의 외모와 태도에 수없이 속고 또 속는다. 시공을 과통해서 항상, 진실 따위는 없는 거짓의 인물은 넘쳐난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거짓의 존재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다섯번째 인물 빌 해리건은 일찌감치 사람을 죽이는 일을 시작해서 일찌감치 총에 맞아 죽었다. 

"정확한 숫자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21명의 죽음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물론 멕시코 사람들은 셈에서 뺀 숫자지만" 그는 그 대담무쌍한 6년의 시간 동안 그러한 사치를 즐기고 다녔다. 용기라는 사치."('냉혹한 살인자 빌 해리건' 중에서)

'용기라는 사치'는 다른 말로 '만용', '무모함'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무모함에는 댓가가 따르는 법.

 

3. '기타 등등'의 이야기들 가운데 '꿈을 꾸었던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행복에 대한 지혜를 담았다. 행복이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까이 에 있다는 것. 

 

4. 나는 '대담: 보르헤스가 보르헤스에 대해 말하다'를 읽으면서 그의 책을 좀더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보르헤스와 그의 작품은 동시대의 세계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멀리 떨어져 있는 그의 세계는 상징적이고 마술적이다. 그의 세계는 상상의 존재들, 환상들, 미로들, 단도들, 거울들로 가득 차 있다."(리타 기버트의 글 중에서)

30대 후반부터 시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급기야 시력을 상실한 작가 보르헤스는 상상의 세계, 머리 속의 세계를 글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세계가 궁금해졌다.

 

50대 중반, 큰 글씨 이외에는 책을 읽을 수가 없었던 보르헤스는 국립도서관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형용할 수 없는 아이러니'라고 표현했다. 8만여 권에 달하는 국립도서관의 책들을 놓고 읽을 수 없는 처지가 된 보르헤스. 그의 상황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시력을 잃어온 상태라서 자신의 상황을 훨씬 덜 슬프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5. '대담' 속에서 보르헤스의 말

"나는 <현실은 일상적인 것이고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은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지구가 생겨 온 이래 정열과 관념과 추측들은 일상적인 것만큼이나 현실적이었고 그리고 게다가 그것들은 늘 일상적인 것들까지 만들어내곤 했습니다."

"내가 영감을 받았던 사람들은 내가 읽었던 책들과 그리고 또한 내가 읽지 않았던 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앞서의 모든 문학. 나는 내가 이름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신학에 관한 많은 책들)이 내겐 흥미로웠지만 그것들은 단지 나의 상상력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가능성으로서였지요."

"기버트: 당신은 여행하기를 좋아합니까?

보르헤스: 나는 전혀 여행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내가 여행을 많이 했다는 사실을 좋아합니다. 나는 <사람은 기억을 통해 여행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론 과거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 당시로서의 현재가 있어야겠지요."

 

6. 나는 보르헤스의 '환상적 사실주의'라는 개념이 궁금하다.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보르헤스를 좀더 읽어야겠다.

장애가 오히려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르헤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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