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을 다시 보다 보니,
서류로 판단하는 합리적인 형사 서태윤을 폭력형사로 돌게 만드는 연쇄살인 용의자 박현규를 연기하는 박해일의 연기에 한번 더 감탄했다.
내가 박해일이란 배우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서였다.
조연으로 나왔지만 그의 존재감은 적지 않았다.
곱상한 얼굴에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이면서도 우울하고 사이코틱한 어두운 분위기를 묘하게 분출하는 박현규 역은
이후 박해일이란 배우가 우리에게 보일 다중적인 연기를 예고하는 배역이었다고 생각된다.
연이어 박흥식 감독의 [인어공주]에서 주연을 맡았는데,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인물로 나왔다.
아마도 이 즈음이었던 것 같다.
박해일이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둥 하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그는 선량한 얼굴, 사악한 얼굴 모두를 가진 독특한 자기만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배우가 분명해 보였다.
[인어공주(2004)]에 이어 다음 해는 21세기 풍의 로맨틱 코미디 [연애의 정석(2005)]에서
능청스럽고 엉큼하고 뻔뻔하게 들이대는 비루한 남자로 나온다고 한다.
아쉽게도 난 이영화는 보지 못했다.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지 않는 탓에.
하지만 박해일의 또 다른 면모를 보려면 이 영화를 봤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봉준호 감독의 또 다른 영화, 가족 판타지 <괴물<2006)>에서 주연을 맡았다.
보잘것없는 가족의 찌질한 삼촌역으로.
다음해 김한민 감독의 스릴러물인 [극락도 살인사건(2007)]에서도 주연으로 나온다.
[극락도 살인사건]은 [살인의 추억]과 마찬가지로 추리소설적 재미를 주는 한국판 스릴러물로 평가받았다.
[살인의 추억]에서 서스펜스적 긴장감을 더해주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기에 [극락도 살인사건]에도 캐스팅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박해일이라는 인물은 미스터리 스릴러물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배우로 보인다.
2008년 박해일은 로맨스, 액션, 미스터리 장르가 혼합된 영화 정지우 감독의 [모던 보이(2008)]에서
자기변화를 겪어가면서 겪는 복잡한 심리적 변화를 표현해야 하는 주인공 이해명의 역할을 맡는다.
다양한 장르를 끌어안고 그 속에서 다양한 얼굴을 보여야 하는 주인공이라면
그 사이 여러 장르를 오가면서 다양한 연기를 펼쳐보였던 박해일이야말로 가장 적당한 배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강우석 감독의 범죄영화 [이끼(2010)]에서 유선생의 아들 유해국이라는 인물로 또 주연을 거머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박해일이 특별히 돋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천용덕 이장역을 맡은 정재영이나 박민욱 검사역을 맡은 유준상 등의 역할이 훨씬 강렬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장의 개, 약간 부족한 인물 덕천역을 맡은 유해진의 신들린 조연연기도 빠뜨릴 수 없다.
반면 김한민 감독과 두 번째로 만난 [최종병기 활(2011)]에서 박해일의 열연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박해일이 맡은 역할은 조선 최고의 신궁 남이.
어떤 평론가는 흔들리지 않는 동공으로 목표를 조준하는 신궁의 역할에 눈이 깊은 배우 박해일이 적격이라고 적고 있었다.
아무튼 액션 영화에서조차 연기자적 역량 있음을 입증한 것으로 보인다.
느리고 차분하게 진행되는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에서 북경대 최교수 역할을 맡은 박해일.
감독이 지루할 정도로 속도가 느린 영화 속에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칠 배우를 찾는다면,
박해일은 훌륭한 선택이다.
잘 생겼으면서도 속물적인 남자 최교수를 박해일은 잘 맞는 옷을 입은 듯 연기한다.
영화 자체는 재미없지도 아주 재미있지도 않지만 메시지가 있는 영화다.
같이 밥먹고 같이 울고 웃으면 가족이라는 대사가 말해주는 '열린 가족'에 대한 메시지.
나도 이 메시지에 완전 공감한다.
여전히 혈연이 가족의 핵심인듯 하지만, 반드시 혈연이 가족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
아무튼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는 순전히 박해일이 출연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건 그렇고, <고령화 가족>에서 박해일은 실패한 영화감독으로 나온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뻔뻔하기도 하고 진지하기도 한 인물연기를 펼친다.
역시나 기대한 대로 박해일은 연기 참 잘 한다.
줄기세포논문조작사건을 다루는 임순례감독의 <제보자(2014)>에서 박해일이 주연으로 나온다고 했을 때,
또 어떤 연기를 얼마나 멋지게 펼쳐낼지, 어떤 다른 면모를 보여줄지 자못 궁금했다.
진실을 밝히는데 전력을 다해 동분서주하는 윤민철PD로 분한 박해일,
그의 연기력은 기대했던 대로였고 손색이 없었다.
가장 최근에 보았던 <경주>에서 보여준 연기보다 <제보자>의 PD역이 훨씬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의 뛰어난 연기력이 더 돋보이는 작품.
그리고 [나의 독재자]에서는 김일성 연기에 빠져 있는 아버지의 아들, 태식의 역할로 나온다.
태식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일도 하지 못하는 인물.
아버지를 싫어하는 찌질한 놈으로 나온다.
박해일은 참으로 비루한 역도 잘도 해낸다.
이 영화에서는 설경구의 연기가 돋보여 상대적으로 박해일의 연기에는 시선이 덜 갔다.
그럼에도 박해일의 연기력은 여전하다.
박해일이 나온 영화 중에서 내가 실망한 것은 정지우 감독의 [은교(2012)].
여기서 박해일은 노교수 역을 맡았는데, 그의 연기가 전혀 돋보이지 않았다.
아니, 도저히 몰입이 되질 않아서 영화를 보다가 중단했다.
책이나 영화를 아무리 재미없어도 거의 끝까지 보는 편인데, [은교]는 보다가 중단한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이고,
그 영화의 주연이 박해일이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그가 출연한 영화 중 가장 최근에 본 것은 작년이다.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2017)]에서 그는 주연을 맡았다. 인조역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병헌과 김윤석의 연기가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박해일의 연기가 빛나지 않았다.
1977년생인 박해일, 올해로 그의 나이 마흔 하나.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 속에서 다양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 누구보다 연기의 폭이 넓은 배우다.
앞으로 그가 보여줄 연기는 어디까지일까?
(2015.7.11. 수정)(2018.4.16. 재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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