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꽂혀 있던 이 책은 무척 낡았다.
많은 청소년들이 손과 눈이 거쳐간 책이라는 뜻이겠지.
'프루스트 클럽'이라는 책 제목 때문에 읽어보기로 한 이 책은 읽고 보니 성장소설이었다.
'나'는 17살 청소년 윤오. 윤오가 우연히 만난 학교를 다니지 않는 18세 청소년 나원,
그리고 윤오가 전학한 학교에서 알게 된 효은, 이 세 명의 청소년은 프루스트 클럽의 멤버가 된다.
프루스트 클럽은 윤오와 나원이 만든 일종의 독서 모임이다.
그런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장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 권을 읽기로 한 모임이다.
나원이가 말했다.
"나, 이런 책 한번 읽고 싶긴 했거든. 아주 길고 지겹고 어려운 책."
프루스트 클럽의 목표는 올해 안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 읽는 것.
규칙은 하나. 중간에 뛰어넘거나 모르는 채로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것.
프루스트 클럽의 모임은 그 주에 자기가 읽은 부분에서 모르는 것, 재미있었던 것, 흥미를 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처음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 이야기했던 날, 나원이는 맨 앞에 나오는 몇 페이지를 직접 읽어 주었다.
나원이의 목소리, 밤과 어둠, 잠과 기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내가 눈으로 책을 읽는 것과 누가 읽는 것을 듣는 건 달랐다.
같은 이야기인데 다른 이야기인 것처럼, 새롭게 들렸다.
계획했던 것과 달리 학년이 바뀌기 전까지 다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 읽지 못한다.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읽자고 했지만 나원이가 캐나다로 떠나게 되면서 그 계획은 중단된다.
갑자기 효은이가 일어나 책장을 뒤지더니 책을 두 권 꺼냈다.
"자, 이건 내 선물."
하얀 문고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첫째권. 프랑스 어 원서였다.
나원이는 책을 조심스럽게 들춰 보고 말했다.
"새 책과 함께 끝나는 구나. 끝나는 거랑 시작하는 건 언제나 맞물려 있다더니."
"다 읽으면 연락해."
"이걸? 아니면 번역본?"
"아무거나."
"지금부터 프랑스 어를 배워서 읽으려면 몇 년이나 걸릴까."
"배우기는 하려고?"
"그럼. 책도 받았는데 배워야지."
나는 짐짓 심각하게 말했다. 나원이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기 전에만 다 읽어. 이건."
효은이가 말했다.
효은이는 다시 물었다.
"왜 하필 그 책이었어?"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끌었다. 왜 그 책이었지. 창가에 선 효은이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거의 주황색으로 보였다. 반짝였다.
"몰라."
그냥 그렇게만 대답했다. 어렵고 지루하고 긴 책. 하지만 왜 그래야 했을까? 효은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교실로 들어갔다.
나는 나중에야 대답을 발견했다. 그 책은 약속의 담보같은 것이었다고.
무엇도 걸 수 없고 무엇도 믿을 수 없었기에 우리는 그 책을 읽기로 한 것이었다고.
아주 어렵고 길고 읽기 힘든 것을 다 읽을 때까지 곁에 있자는 약속.
아주 어렵고 길고 힘든 때에 함게 있자는 약속.
끝내 지키지 못한 약속.
윤오에게 안정감을 주었던 관계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카페주인인 오데뜨도 연말파티를 한 다음 갑자기 사라지고
고2가 되기 직전 나원이도 캐나다로 떠나고
고3이 되었을 때 효은이는 자살하고...
윤오의 청소년기는 절망스럽게 끝이 나간다.
하지만 일본에서 고호 그림 전시회장에서 힘들었던 추억을 꺼집어내게 되고
그 추억에 직면하면서 힘들었던 경험들을 긍정할 힘을 얻는다.
절망스러운 경험, 기억조차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읽기를 끝내지 못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계속 읽기로 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읽던 중에 나의 청소년기가 떠올랐다.
친구들과 함께 했던 독서모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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