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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서늘한 유년의 기억, 에쿠니 가오리의 <수박향기>

즐거운책벌레/소설

by 산삐아노 2014. 8. 4.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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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눅하고 후덥지끈한 여름날, 에쿠니 가오리의 <수박향기>를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서늘해져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까.

 

"덥다."

창밖을 보면서 M이 말했다.

"여름은 참 싫더라. 싫었던 일만 떠오르고."

"초등학교 때 일 같은 거?"

나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해보았다.

"뭐 그렇기도 하고."

저물어가는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M은 아득한 표정을 짓는다.

('그림자' 중에서)

 

각각의 단편소설은

무더운 여름날, 초등학생인 '내'가 만났던 사람, 겪었던 일에 대한 불편한 기억,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아 가슴 깊숙이 담아놓았던 기억을 풀어놓은 것 같다.

 

'수박향기'에서 '나'는 아홉살 여름방학을 숙모집에서 보내게 된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숙모의 돈을 훔쳐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해가 지고

불빛이 켜진 집에 들어섰다 한 몸을 공유하는 두 남자아이,

기형아인 미노루와 히로시를 만났던 기억. 

 

'후키코씨'에서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하숙을 쳤는데,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온 하숙생이 20대 중반의 '후키코'라는 여성이었다. 

동네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나',

동네 아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한 구덩이를 파 주었던 후키코씨, 

구덩이를 판 후 갑자기 사라진 후키코씨에 대한 불편한 기억.

 

'물의 고리'에서는 말매미가 요란하게 울어대던 일곱상의 여름, 도교 외곽으로의 이사한 후 만난

'야마다 타로'라는 10대 중반의 언어장애 청소년 이야기가 나온다.

달팽이를 살육하던 내 비밀을 엿본 야마다 타로,

그가 내게 죽은 말매미를 주었던 날의 공포스러운 기억. 

 

'바닷가 마을'에서는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후 바닷가 마을로 이사해 열 한살의 지루한 여름날을 보내던 시절,

빵공장 뒷마당에서 어떤 아주머니를 자주 만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꽈리를 우물거리며 먹는 아주머니의 입에 대한 증오,

아주머니에게 준 금붕어를 닮은 납작한 유리구슬에 대한 기억.

 

'남동생'은 어느 여름날 20대 나이로 죽은 남동생의 장례식 때 떠올린 기억을 담고 있다.

남동생이 초등학생에 입학한 해 여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남동생이랑 함께 만든 '장례식 놀이'에 대한 기억. 

 

'호랑나비'는 싫어하는 신칸센, 특히 싫어하는 8월의 신칸센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이면 신칸센을 타고 외가로 가야했던 '나',

신칸센 안에서 만난, 허벅지에 검정, 보라색 호랑나비 스티커를 붙이고 있던 여자가

내게 같이 도망치자고 제안했지만 결국 도망치지 못해 절망스러웠던 기억.

 

'소각로'에서는 4학년 여름방학, 대학생들이 그림자극을 순회공연하러 왔을 때 '내' 마음을 끈 한

무표정한 한 남자대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훔친 물건을 학교 소각로에서 태우곤 했던 '나',

양호실에서 들락날락하던 '나',

거짓말을 주저하지 않던 '나',

그 대학생이 떠나는 날 그 대학생의 손바닥에 면도칼을 그은 '나'...

 

'재미빵'에서 어느해 여름방학 때 아빠노릇을 하던 신이치삼촌이 결혼할 여자를 데려온다.

그 여자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기억.

 

'장미아치'에서는 여름방학마다 외조부댁에 가서 지냈는데, 4학년 여름방학 때 우연히 만난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괴롭힘을 당한 '난',

거의 매일 그 여자아이를 만났고 그 아이에게 여러가지 거짓말을 한 기억.

 

'하루카'는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때의 친구 '하루카'이야기다.

엄마가 일하러가면 동생 둘을 돌봐야 했던 하루카,

하루카 집에 가서 놀았던 기억.

유괴범 출몰 소문으로 불안했던 시절, 어떤 청소년에게 하루카와 함께 성추행당한 기억.

 

'그림자'는 그림자처럼 '내' 주변에 있으면서 나를 도와주던 초등학교 때 친구 M 이야기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같은 반이 된 후로 성인 되어서까지 이어진 M과의 만남.

이혼을 하고 난 다음에도 만난 M,

하지만 M에 대해서는 레즈비언일지 모른다는 소문 뿐 아무 것도 모르는 나...

 

초등학교 시절 여름날, '나'를 불편하게 했던 여러 일들, 그리고 그때 만났던 사람들의 낯섬에서 온 서늘한 기억에 대해

작가는 섬세하게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왜 오싹하는 기분이 들까? 공포물도 아닌데...

어린 아이가 겪어내야 했던 힘든 경험들, 그 경험과 뒤엉킨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그 속에서 느끼는 아이의 감정, 거짓말하고 훔치는 아이의 뒤틀린 말과 행동이 싸늘한 느낌을 안겨주는 것이다.

어쩌면 그 아이의 슬픔, 고독감, 절망감이 주는 냉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고나서 나의 유년기를 잠시 떠올려보려 애썼다.

부모와 떨어져 조부모와 살아야 했던 나는 유달리 말이 없는 무표정한 아이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유치원 시절 또래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면서도 내가 겪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 일이 고통스럽지도 않을 만큼

감정이 없는 혼자 노는 아이였다.

위의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나'와는 다르지만

고독한 아이였던 나의 이야기를 한 번 써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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